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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아시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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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색 === 금호그룹의 인식과는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전라도|호남]]을 연고로 하는 [[향토기업]]으로 인식되는데, 금호그룹이 [[전라도]]를 기반으로 시작하고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금호그룹의 모체인 광주여객을 세운 [[박인천]] 창업주는 [[전라남도]] [[나주시]] 출신이었고 생전에 광주에서 살면서 광주를 지역 기반으로 삼아 사업을 시작했으며, 훗날 금호의 사업을 이어받은 아들들인 [[박성용(기업인)|박성용]], [[박정구]], [[박삼구]], [[박찬구]], [[박종구]] 등 아들들도 모두 광주에서 나고 자란[* 특히 장남 박성용 전 회장부터 사남 박찬구 회장까지는 전부 광주의 최고 명문 중학교였던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했다.] 인물들이었다. 더구나 1960년대까지 지방의 흔한 버스 회사였던 광주고속은 1971년 호남고속도로의 개통 후 전라도의 고속버스 노선을 1위로 '''과점'''하는데 성공하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여기에는 고향에 대한 애착과 결집력이 유난히 강했던 전라도 사람들의 절대적인 성원이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거기에 전라도는 경상도에 비해 여객철도편이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버스를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환경도 겹쳤다. 전라도에서 어렵게 상경해서 근근히 서울살이를 이어가던 중 고향 전라도에서 올라온 광주고속의 버스를 보고 반가움과 그리움의 눈물을 훔친 뒤 기사들에게 "이 버스 전라도에서 온 것이 맞소?"라고 물어봤다는 이들의 일화가 존재할 정도. 그리고 그들은 고향으로 내려갈 때 무조건 광주고속을 이용했으며, 주변인들에게도 광주고속을 이용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광주고속이 급성장하던 1970~1980년대 [[호남소외론|호남에 대한 주류 사회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소외와 핍박]]이 극에 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광주고속을 비롯한 금호그룹은 그야말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전라도 사람들의 한을 달래 주고 자존심을 지켜준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라도 사람들은 본인들이 어려웠던 시절 금호라는 브랜드를 키워 줬지만 오히려 전라도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성장한 금호그룹은 전라도 지역 사회를 향해 미온적으로 지원했고, 호남지역 출신 인재 채용에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금호를 사랑했던 전라도 사람들이 "다른 기업이 그러면 몰라도 금호가 우리한테 그러면 안된다"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감정이 난립하던 당시에는 여느 기업보다도 전라도 출신 인재 채용에 신경을 많이 썼었던 기업도 금호그룹이였다는 사실을 배제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룹이 건재했었을 때 경영진들은 거의 호남 출신들로 채워져 있었고, 여러 사업장 내에서도 서남방언을 흔히 들을 정도로 전라도 출신 임직원들이 생각보다 많았기도 했었으며, 산업기반이 타 지역보다 부족했었던 예전에는 고향을 떠나 수도권으로 상경한 주민들 또한 많았으므로 이 중에서도 금호그룹에 입사한 사람들도 많았었다. 이렇게 그룹의 모태가 [[전라도]]에서 시작되어 성장한 연유로 전라도 기업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금호그룹 측에서는 전라도 기업만으로 인식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의 규모 자체가 대단히 커져서 [[향토기업]]이란 타이틀에 큰 의미를 두기 보다는 고르게 시선을 분배해야 할 필요성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표적인 전라도 기업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게 오늘날 [[전북특별자치도]]에선 금호의 영향력이 광주/전남에 비해 많이 약한 편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임원중 80~90%가 전라도 출신이었으나 아시아나항공 출범 이후로는 호남 출신과 비호남 임원의 비율이 5대5 수준의 균형을 갖췄었다. 또한 [[재계 서열]] 기준으로 보자면 전라도를 대표하는 기업집단은 이제 [[중흥그룹]] 혹은 [[하림그룹]]이다. 1. 이제는 단순히 광주택시로 시작했다는 이유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전라도]] 기업으로 보기에는, 현재 그룹의 매출과 채용 규모가 지역에 큰 영향을 준다고 보기 어렵다. 1. 무엇보다 지역 사회에서 기여할만한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 전라도에서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는 기업들은 광주광역시의 [[기아 AutoLand 광주]], 완주 봉동의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군산의 [[타타대우상용차]], 익산의 [[하림]] 공장 내지 [[여수국가산업단지]] 내에 있는 [[GS칼텍스]], [[금호석유화학]], [[여천NCC]], [[DL이앤씨]] 등이다. 본사가 광주에 있는 [[금호타이어]]도 전라도 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지만, 금호타이어는 2018년도 이후로 금호아시아나의 품에서 떠나 중국의 [[더블스타]]로 경영권이 넘어가 버려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룹과의 연관성이 없는 남의 기업이 되었다. 또한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시절 서울항공으로 시작하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성장했기 때문에 전라도와 연관이 적다. 그래도 첫 국내선 노선은 [[김포-광주 항공노선|김포-광주]]로 시작하긴 했지만. 1. 그리고 운수회사 시절, 사세를 확장할 때 9~12개월씩 임금을 체불하고 다시 그 돈과 융자금을 합해 신규계열사(예, 삼양타이어)[* 금호타이어의 전신.]를 설립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 인심을 많이 잃었다.[* 동종 업자였던 [[한진그룹]]의 조씨 일가 역시 자사 직원들을 그다지 후대하지 않았지만, 이쪽은 주로 미군들을 상대하며 성장했고 결정적으로 사세를 확장한 것도 월남전 때 현지 미군 및 파월한국군 사령부의 지원 하에 일을 맡았던 데에 힘입은 것이었다. 또한 전쟁 통에 중간중간 미군 물자를 전용하는 것도 가능했던만큼 굳이 직원들 월급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었던 것. 당시는 군에서 귀국 box나 손망실 처리 등으로 미군이 지원해준 양질의 물자들을 국내에 '''비공식적으로''' 반입하는 상황이었기에, 이런 부분까지는 파월사령부에서 큰 제재를 가하지 않았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상기의 내용은 그룹이 살아 있었을 때 이야기이며, 현재는 사실상 '''그룹이 해체'''되고 이제 남은건 [[금호고속|고속]]과 [[금호건설|건설]]뿐이니 한때 전국구를 넘어 [[금호타이어|타이어]]와 [[아시아나항공|항공]]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도 진출한 이력이 있었던 재벌그룹이 다시 중견 규모로 쪼그라들게 되면서 전라도로 귀환하게 되어 향토기업 타이틀이 다시 자연스레 부여된 셈. 이때문에 전라도에서는 투자를 바라는 경우가 많지만, 금호그룹은 전라도의 스포츠 구단에 투자하는 것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투자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우그룹]]이 야구장(무등경기장) 건설에 가장 많은 기금을 쾌척해 지역 사회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대에는 소비재에 대한 광고 효과를 노리고 창단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금호에는 당시 그런 게 없었다. 우선 [[금호고속|고속버스]]나 [[아시아나항공|여객기]]의 경우 시간대와 노선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금호건설|아파트]]의 경우 입지 조건을 고려하기 때문에 소비재에 비해 고객의 충성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소비재라 할 수 있는 [[금호타이어|타이어]]의 경우 1980년대에 [[자가용]] 보유량이 낮았음을 생각하면 썩 효과적이지 못하며, 금호전자의 경우 1980년에 사업을 이미 접었기 때문에 프로야구 논의가 있던 1981년 시점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렇게 그룹 시스템이 아직 탄탄하지 못한 여건으로 인해 박인천 - 박성용 부자는 프로 야구단 창단에 반대했다.[* 더구나 박성용 회장은 스포츠보다 음악에 관심이 더 많았다. 금호아트홀에 본인이 매번 고정적으로 앉는 자리가 있을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은 [[클덕]]이었다.] 결국 [[삼양사]], [[교보생명]]에도 거절당한 전라도의 프로야구단은 [[해태제과]]에 낙점되면서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한 것이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를 매각할 당시에도 금호그룹에선 전혀 나서지 않았고, 대신 광주광역시에 제조 공장[* 본래 [[아시아자동차]] 공장이었다.]을 둔 [[기아]]([[현대자동차그룹]])에서 인수해서 2001년 7월부터 [[KIA 타이거즈]]가 되었다. 만에 하나 금호 타이거즈가 되었어도 금호의 재무 상황이 나빠지는 모습을 보면 주인이 또 바뀔 운명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3년에 서울 연고의 프로축구단을 창단하려했으나 광주, 전남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창업주의 5남인 [[박종구]]가 지역색이 다른 [[이명박 정부]] 하에서 [[교육과학기술부]](현재 [[대한민국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을 지내고, 자회사인 [[아시아나항공]]이 [[에어부산]]을 만드는 등 그룹 차원에서는 적극적인 듯. 이 때문에 전라도 연고의 프로 스포츠 관련해 그룹 측의 지원은 지역민들의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다. 다만 스포츠 문제의 경우엔 다른 이유도 있긴 하다. 본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부터 현재까지 주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예술 분야에 대한 투자 및 인재 육성에 노력을 기울인 대신 상대적으로 프로 스포츠 분야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한때 금호생명에서 [[OK저축은행 읏샷|WKBL 팀]]을 운영했던 게 거의 전부였고, 이마저도 [[한국산업은행]]에 인수되어 운영하다가 [[OK저축은행]]의 위탁 운영을 거쳐서 [[BNK금융지주]]로 매각되어 [[부산 BNK 썸]]이 되면서 [[해체 후 재창단|이전 역사를 가져가지 않고 완전히 새로 출발했다]]. 그나마 2013년부터 2018년까지 [[금호타이어]]가 [[KIA 타이거즈]]의 유니폼 스폰서로 참여한 바 있고, 1995년 [[광주비엔날레]] 설립 시 30억원을 후원함과 더불어 그 이후에도 광주비엔날레를 꾸준히 지원해 주었다. [[2012 여수 엑스포]],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공식 후원사로 참여한 바 있으며, 그 훨씬 이전인 1990년대 말에는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 중이였던 투수 [[선동열]]에게 3년간 아시아나항공 일등석 무료 항공권을 제공해 준 바가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학교법인인 죽호학원에 소속된 광주 [[금호고등학교(광주)|금호고등학교]](운암동 소재)는 [[광주 FC]]의 U-18 유소년클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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