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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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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 ||<tablealign=center><tablewidth=700><tablebordercolor=#005ba6,#005ba6><colbgcolor=#005ba6,#005ba6><colcolor=#ffc224,#ffc224><nopad> [[파일:민주당 입주기념 리셉션에서 대화를 나누는 김대중 대표와 노무현 대변인.jpg|width=100%]] ||<colbgcolor=#005ba6,#005ba6><colcolor=#ffc224,#ffc224><nopad> [[파일:꽃다발을 들어 군중들에게 화답하는 김대중 대통령후보와 노무현 부총재.jpg|width=100%]] || || '''민주당 입주기념 리셉션에서 대화를 나누는 김대중 대표와 노무현 대변인''' || '''꽃다발을 들어 군중들에게 화답하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노무현 부총재''' || ||<tablealign=center><tablewidth=700><tablebordercolor=#005ba6,#005ba6><colbgcolor=#005ba6,#005ba6><colcolor=#ffc224,#ffc224><nopad> [[파일:대선 승리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jpg|width=100%]] || ||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과 악수하는 김대중 대통령''' ||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당계 정당]]의 쌍벽 중 하나였지만, 그들의 하위 세력들은 서로 계파 갈등을 당 내부에서 일으키다 훗날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태를 거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만남은 김영삼이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김대중이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1990년)|꼬마 민주당]] 창당에 합류한 노무현은 1년 후 [[신민주연합당|신민당]]과의 [[민주당(1991년)|합당을 통해]] 김대중과 동행하게 되지만, 애당초 출신 지역부터가 경남권인데다 정치 성향도 김대중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던 터라 민주당쪽에서도 비주류에 속했다. 게다가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 [[하나회]]를 축출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단죄하면서 호랑이 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던 3당 합당의 진짜 목적을 이뤄내자 김영삼과 결별했던 노무현의 입지가 경남권에서 더더욱 좁아진데다, 김대중이 1995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것을 두고도 구시대적인 패권 정치라는 비판을 한 뒤 [[통합민주당(1995년)|민주당 잔류를 선택하면서]] 출신 지역 및 야권 주류 모두에서 외면받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1개월 전 민주당이 [[신한국당]]과의 합당으로 [[한나라당]]이 되자 이에 반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를 맡았고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이듬해 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하려다가 [[고건]]이 전략공천된데 대해 미련없이 승복하자[* 이 때 노무현과 경쟁한 당내 인사가 바로 [[한광옥]]이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김대중의 최측근이었음에도 서울시장 전략공천에 강하게 반발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으로부터 '''"정치는 노무현처럼 해야 한다."'''는 극찬을 받을 만큼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되었으며 [[1998년 재보궐선거|불과 한 달 뒤의 재보궐선거에서]] [[종로구(선거구)|종로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6년만의 국회 복귀에 성공하게 된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2년 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감정 타파를 부르짖으며 [[북구·강서구 을|부산 북구·강서구 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4개월 후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되어 국무위원으로서 행정 경험을 쌓음과 동시에 격식을 타파하는 행보로 주목받았으며, 2년 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새천년민주당]] 국민 경선에서 일명 '''노풍'''을 타고 노무현이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애당초 노무현이 민주당의 대권 후보 자체로는 거론되었지만 실제 선출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고 여겨졌는데,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의 표를 잠식해 무려 19.2%(492만여표)를 얻어낸 [[국민신당(1997년)|국민신당]] 후보 [[이인제]]가 1998년 9월 합당 형식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 들어오면서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것이 매우 확실했고 김대중의 가신인 [[한화갑]] 의원과 [[유종근]] [[전라북도지사]]까지 경선에 뛰어들면서 김대중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 그러나 김대중은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사실상 노풍을 암묵적으로 지지했고[* 특히 민주당 텃밭인 [[광주광역시]]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하는 대이변이 벌어졌는데, 이는 노무현이 이회창을 상대로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민주당 후보라는 여론조사 결과의 영향도 컸지만 김대중의 침묵 또한 영향이 꽤 컸다.] 그 결과 노무현이 민주당 경선을 통과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 김대중의 [[김홍일(1948)|아들]] [[김홍업|3명]] [[김홍걸|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사법 처리 수순을 밟은데다 [[국가정보원]]을 이용한 도청 및 친인척 비리 등의 여러 스캔들로 호남권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 [[이회창]]의 지지율이 높아지던 와중에 노무현이 경남권 지지율 확장 및 진보 지지층 흡수 등으로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이끌어낼 유일한 카드로 돋보였던 것 역시 민주당 경선 승리의 원동력이기도 했는데, 이는 경남 기반 김영삼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김대중 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지역 감정 타파에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은게 밑거름이기도.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국민의 정부 불법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이 주도한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에 동교동계의 반발이 거셌고, 대선 때 9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호남권의 민심도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 해 4월 22일 [[청와대]]에서 노무현-김대중의 부부 동반 오찬 회동이 있었고 이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직접적으로 반목할 지경까지는 아니었고, 이후 특검 연장을 노무현이 거부하면서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친노]] 세력간에는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훗날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구 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권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교동계 인사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친노 성향 의원과 한나라당의 옛 민주당계 의원 5명 등을 주축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새천년민주당까지 가세하자 김대중은 "탄핵 사태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 정치가 변화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라는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의 편을 들었으며, 노무현이 탄핵 심판 기각으로 복귀하자 환영한다는 발언을 했다. 2009년 5월 23일 김대중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는데, 그날 새벽 노무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지만 정부의 사실상 거부로 대신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책의 추천사로 갈음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쇠약해졌는데도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분향소에 조문을 갔고, 영결식 당일에는 비서의 부축까지 받아가며 끝끝내 헌화까지 스스로 한 뒤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악수하며 오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었지만 사적으로는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이때부터 김대중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노무현이 사망한 지 3개월 만에 김대중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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