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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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노무현
- 대한민국 대통령
- 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
- 1946년 출생
- 2009년 사망
- 김해시 출신 인물
- 광주 노씨 매죽와공파
- 진영대창초등학교 출신
- 진영중학교 출신
- 개성고등학교 출신
- 육군 출신
- 대한민국의 판사 출신 변호사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출신 인물
-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 제13대 국회의원
- 제15대 국회의원
- 통일민주당 국회의원
- 민주당(1990년) 국회의원
- 민주당(1991년) 국회의원
-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
-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 국민의 정부/인사
- 해양수산부장관
- 판사 출신 정치인
- 변호사 출신 정치인
- 사회운동가 출신 정치인
- 2008년 은퇴
- 대한민국의 농부
- 대한민국의 환경 운동가
- 자살한 인물
- 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
- 자살한 정치인
- 무궁화대훈장
- 흰독수리 훈장
- 코끼리 기사단 훈장
- 인터넷 밈/정치인/대한민국
- 사법연수원 출신/7기
- 시위의 상징
- 추락사한 인물
출생 | |
사망 | |
사저 | |
묘소 | |
재임기간 | 제16대 대통령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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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약력 [편집]
- 1959.2. 진영대창국민학교 졸업
- 1966.2.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 1966. 제7회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 합격
- 1975.3.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 1977.8. 제7기 사법연수원 수료
- 1978. 노무현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81. 부산YMCA 이사
- 1982.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84.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
- 1985.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
- 1987. 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
- 1987. 공정선거감시운동 부산지부부장
- 1988. 통일민주당 노동정책연구소 위원장
- 1988.11. 제13대 국회 제5공화국정치권력형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
- 1988. 통일민주당 노·사문제특별위원장
- 1990.7. 민주당 기획조정실장
- 1990. 민주당 부산 동구 지구당위원장
- 1991. 민주당 부산 동구 지구당위원장
- 1991.9. 민주당 대변인
- 1992.3.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 (부산 동구 / 낙선)
- 1993.3. 민주당 최고위원
- 1993.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소장
- 1993.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18]
- 1995.6.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
- 1995. 통합민주당 부총재
- 1995. 통합민주당 종로구 지구당위원장
- 1996.4.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통합민주당 후보 (서울 종로구)
- 1996. 국민통합추진회의 상임집행위원
- 1997.11.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 1997.11. 제15대 대통령 선거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파랑새유세단장
- 1998. 새정치국민회의 종로구 지구당위원장
- 1998.7. 제15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1998. 새정치국민회의 부당노동행위대책특별위원장
- 1999.2. 새정치국민회의 경상남도당 위원장
- 1999. 새정치국민회의 동남지역발전특위위원장
- 1999. 새정치국민회의 실업대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장
- 1999.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 수료[21]
- 2001.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 2001. 법무법인 부산 변호사
- 2001.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 2002.4.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후보
- 2003.2.25. ~ 2008.2.24.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 2004. 열린우리당 수석당원
- 2004.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6. 알제리 알제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7. 원광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 2008. 맑은물사랑사람들 명예고문
- 2008. 영농법인 주식회사 봉하마을 이사
3. 일생 [편집]
공식 초상화[22] |
고졸 학력으로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 사법시험 전체 합격자 60명 중에 단 둘뿐인 고졸 합격자였다.[23]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7개월 만에 사퇴하고 1978년 부산광역시에서 변호사 사무소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하였다. 한편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권 변호사 활동 경력을 눈여겨본 김영삼의 제의를 받아 1988년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같은 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 재벌 회장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질의하는 모습이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합당에 찬성한 김영삼과 결별하였고 민주당계 정당에 눌러앉게 되었다. 이후 영호남 지역주의가 심화되며 부산에서 본의 아닌 고전을 거듭하던 중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종로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선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종로 대신 부산에 출마하여 또 한 번 낙선했다. 이런 모습을 본 지지자들은 그에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탄생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거쳐,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당초 승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평가된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1위를 하는 대이변을 일으켰고, 본선에서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2.33%p의 근소한 차이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 새천년민주당의 분열이 일어났을 때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열린우리당을 지지해달라는 발언 하나 때문에 새천년민주당이 주도하고 한나라당이 동참하여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고 말았다. 여론으로도 억지 탄핵소추라는 의견이 압도했으며[24], 탄핵심판 또한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되어서 직무에 복귀했다.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퇴임 후 서울특별시가 아닌 고향 경상남도 봉하마을로 귀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친노 진영의 많은 인물들이 박연차 게이트 관련하여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받았으며 노무현과 그의 배우자인 권양숙 또한 수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던 중 2009년 5월 23일 오전 5시 21분에 유서를 컴퓨터에 저장하고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였다. 직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나[25] 두부외상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인해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민장 기간 동안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에 1천만 명에 달하는 조문 인파가 몰렸다. 원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본인이 유서에서 화장하고 집 가까운 곳에 안치하라는 요청[26]에 따라 수원연화장에서 화장되어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근처 묘역에 안치되었다.
3.1. 참여정부 [편집]
3.2. 사망 [편집]
3.2.1. 유서 [편집]
4. 평가 [편집]
4.1. 개인에 대한 평가 [편집]
4.2.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편집]
5. 비판 및 논란 [편집]
6. 정치적 성향 [편집]
전반적으로 진보적 자유주의자에 가까웠다. 정치적으로 이전 정권에 비해서 탈권위주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였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이전 시대에는 금기시 되었던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더 수용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이어나갔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보수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섞여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비하면 철저하게 제3의 길을 따른 사회자유주의 노선을 따랐다. 대외적으로는 국민의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이어나가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대미관계에서 좀더 자주성을 추구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적 지향성은 사실상 노무현이 확립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고 민주당의 기존 주류였던 동교동계와 정치적으로 선을 그으면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대북송금 특검의 여파도 있겠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호남에서의 민심이 좋지도 못했고,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지역주의 타파라는 명분 또한 분당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수정당에 뿌리를 둔 기존 민주당계 정당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영향 때문인지, 사회문화적으로도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역대 집권 자유주의 정권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다.[27]
이러한 정치성향은 개인적으로 존경했던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총리로부터 영향을 다분히 받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참여정부 당시에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재인은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고 민주당의 기존 주류였던 동교동계와 정치적으로 선을 그으면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대북송금 특검의 여파도 있겠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호남에서의 민심이 좋지도 못했고,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지역주의 타파라는 명분 또한 분당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수정당에 뿌리를 둔 기존 민주당계 정당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영향 때문인지, 사회문화적으로도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역대 집권 자유주의 정권 중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다.[27]
이러한 정치성향은 개인적으로 존경했던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총리로부터 영향을 다분히 받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참여정부 당시에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재인은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bgcolor=#fff,#1c1fd1f> 노 대통령은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전 총리 얘기를 자주하며 부러워하곤 했다. 퇴근 후에 경호원 없이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기도 해서 화제가 되었던 분이다. 결국 부인과 함께 경호원 없이 극장에서 영화보고 나오다가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을 맞긴 했지만, 업무시간 외의 사생활을 보통사람처럼 자유롭게 했다. 노 대통령은 그런 나라를 꿈꿨다. 《문재인의 운명》 222p |
노무현 스스로도 회고록에서
<bgcolor=#fff,#1c1fd1f> 스웨덴의 훌륭한 지도자가 1986년 아내와 함께 극장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저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계엄이 선포되고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지도자가 없고, 시민과 같은 높이에서 걸어 다니는 지도자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웨덴이란 나라가 부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로 한번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운명이다》 180p |
라고 언급한 것은 그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국가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7. 묘소 [편집]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9-4 봉하마을에 위치해 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9년 8월 5일에 보건복지가족부 국가보존묘지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보존묘지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본인이 남긴 유서엔 '화장하고 집과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라는 유언이 있었다. 유족들은 고민 끝에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뒷산에 묘역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묘역 설계는 장례식 전날 모인 작은 비석 위원회의 일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맡았다. 이 묘지의 특성 중 하나는 묘역 표면에 모인 1만 5000개의 박석에 적힌 글귀들인데, 국민모금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전할 어귀들이다.[28]
봉화산에서 구해온 너럭바위 위에는 지관 스님이 쓴 '대통령 노무현' 6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밑 묘판에는 신영복이 쓴(일명 신영복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4월 포럼회에서 강연 중 말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가 적혀 있다. 박석(바닥석)에는 국민 참여로 이루어진 추모하는 문구가 새겨저 있다.
2010년대 초까지는 묘소 바위 앞까지 갈 수 있었으나 훼손 기도, 오물 투척 등 경악스러운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한동안은 묘소 근처는 못 가고 좀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 가능했다가 묘소 바위 옆에 순경이 배치되는 조건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의 묘역 중 가장 큰 묘역(3206㎡)으로 법적 묘지 면적의 약 100배가 좀 넘는다. 고인은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했는데 지지자와 유족들에 의해 가장 큰 무덤을 만들어 버린 셈.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은 윤보선[29],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이 묘지가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어 국립묘지 대우를 받는다.[30] 문재인 정부 국무회의 개정안에 의거해서 국립묘지에 모셔지지 않은 전직 대통령의 묘는 대통령령에 따라서 청와대 및 정부가 예산을 사용하여 관리, 보존, 경비가 되도록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무덤은 앞으로도 국립묘지 대우를 받으며 관리될 것이 확실해졌다.
선거철이 되면 민주당계 정당 주요 정치인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찾아오기도 하며[31] 보수정당의 일부 정치인들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편이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본인이 남긴 유서엔 '화장하고 집과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라는 유언이 있었다. 유족들은 고민 끝에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뒷산에 묘역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묘역 설계는 장례식 전날 모인 작은 비석 위원회의 일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맡았다. 이 묘지의 특성 중 하나는 묘역 표면에 모인 1만 5000개의 박석에 적힌 글귀들인데, 국민모금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전할 어귀들이다.[28]
봉화산에서 구해온 너럭바위 위에는 지관 스님이 쓴 '대통령 노무현' 6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밑 묘판에는 신영복이 쓴(일명 신영복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4월 포럼회에서 강연 중 말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가 적혀 있다. 박석(바닥석)에는 국민 참여로 이루어진 추모하는 문구가 새겨저 있다.
2010년대 초까지는 묘소 바위 앞까지 갈 수 있었으나 훼손 기도, 오물 투척 등 경악스러운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한동안은 묘소 근처는 못 가고 좀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 가능했다가 묘소 바위 옆에 순경이 배치되는 조건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의 묘역 중 가장 큰 묘역(3206㎡)으로 법적 묘지 면적의 약 100배가 좀 넘는다. 고인은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기라고 했는데 지지자와 유족들에 의해 가장 큰 무덤을 만들어 버린 셈.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은 윤보선[29],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같이 묘지가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어 국립묘지 대우를 받는다.[30] 문재인 정부 국무회의 개정안에 의거해서 국립묘지에 모셔지지 않은 전직 대통령의 묘는 대통령령에 따라서 청와대 및 정부가 예산을 사용하여 관리, 보존, 경비가 되도록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무덤은 앞으로도 국립묘지 대우를 받으며 관리될 것이 확실해졌다.
선거철이 되면 민주당계 정당 주요 정치인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찾아오기도 하며[31] 보수정당의 일부 정치인들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편이다.
8.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편집]
8.1. 친노 [편집]
8.2. 김영삼 [편집]
김영삼 전 대통령 자택에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후보 |
김영삼은 평소에 손학규,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 이재오 등 여러 인재들을 천거했는데 노무현 역시 김영삼의 제의로 정계에 처음 입문했다.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어온 김광일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김영삼에게 노무현을 추천했고[32] 노무현이 이를 받아들여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동구에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3]
그러나 1990년,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인도했던 김영삼이 노태우 및 김종필과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무현은 그의 행동을 야합으로 보고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함께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의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34], 박찬종과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1990년의 민주당은 당시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허탁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이른바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렸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자신의 라이벌이던 김대중의 후임으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맞받아쳐 김영삼에 대해서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 노무현이 영남 후보론을 내걸고 16대 대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고서는 '영남 민주세력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YS를 통해 PK지역의 지지를 얻고자 김영삼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시도했다. 이에 대선후보로 선출된 다음 주에 김영삼을 예방하고는 금융실명제와 통일민주당 시절 이야기 등에 대해 서로 덕담을 나누며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 때 노무현이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정을 언급했다가 YS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 호남 지지층과 아직 외환 위기의 기억이 생생한[35] 상당수 국민들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지게 되었다. 결국 김영삼은 대선 한달 전인 11월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하게 되고, 후에 노무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둘의 관계는 끝까지 회복되지 못하게 된다.
이때는 노무현도 김영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36],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김영삼과 노무현 두 사람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한동안 서로에게 철벽을 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이 회동은 지지율은 지지율대로 떨어지고 김영삼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만 한 최악의 한수가 되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도 김영삼은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탓이라며 "사필귀정"이라는 말로 냉랭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 의외의 사실이지만,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국회의장이 상도동계에 속한 박관용이었다.
김영삼은 참여정부 시절 내내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를 하며 대립했다. 이 중 유명한 일화가 바로 2006년 10월 11일,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청와대에서 이루어진 전직 대통령 회동에서의 일화다. 당시 회동에는 김영삼, 김대중, 전두환이 참석해 노무현과 오찬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북한의 핵실험은 김대중, 노무현의 햇볕정책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준비해온 성명서를 꺼내 "김대중과 노무현은 사죄하라!"라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오히려 전두환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끼리 싸우자는 거냐. 그만 좀 해라."라고 김영삼을 말렸을 정도였다고. # 이 날의 회동 외에도 김영삼은 민주동지회 신년 인사회 같은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여러 정치인들이 상도동 자택을 예방했을 때도 노무현에 대해 두고두고 비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애도성명을 내고 국민장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심기가 불편했는지, 국민장 2개월 뒤 인터뷰에서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기수는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라고 전했다며 해명했으나, 이 또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90년,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인도했던 김영삼이 노태우 및 김종필과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무현은 그의 행동을 야합으로 보고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함께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의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34], 박찬종과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1990년의 민주당은 당시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허탁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이른바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렸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자신의 라이벌이던 김대중의 후임으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맞받아쳐 김영삼에 대해서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 노무현이 영남 후보론을 내걸고 16대 대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고서는 '영남 민주세력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YS를 통해 PK지역의 지지를 얻고자 김영삼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시도했다. 이에 대선후보로 선출된 다음 주에 김영삼을 예방하고는 금융실명제와 통일민주당 시절 이야기 등에 대해 서로 덕담을 나누며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 때 노무현이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정을 언급했다가 YS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 호남 지지층과 아직 외환 위기의 기억이 생생한[35] 상당수 국민들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지게 되었다. 결국 김영삼은 대선 한달 전인 11월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하게 되고, 후에 노무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둘의 관계는 끝까지 회복되지 못하게 된다.
이때는 노무현도 김영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36],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김영삼과 노무현 두 사람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한동안 서로에게 철벽을 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이 회동은 지지율은 지지율대로 떨어지고 김영삼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만 한 최악의 한수가 되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도 김영삼은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탓이라며 "사필귀정"이라는 말로 냉랭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 의외의 사실이지만,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국회의장이 상도동계에 속한 박관용이었다.
김영삼은 참여정부 시절 내내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를 하며 대립했다. 이 중 유명한 일화가 바로 2006년 10월 11일,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청와대에서 이루어진 전직 대통령 회동에서의 일화다. 당시 회동에는 김영삼, 김대중, 전두환이 참석해 노무현과 오찬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북한의 핵실험은 김대중, 노무현의 햇볕정책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준비해온 성명서를 꺼내 "김대중과 노무현은 사죄하라!"라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오히려 전두환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끼리 싸우자는 거냐. 그만 좀 해라."라고 김영삼을 말렸을 정도였다고. # 이 날의 회동 외에도 김영삼은 민주동지회 신년 인사회 같은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여러 정치인들이 상도동 자택을 예방했을 때도 노무현에 대해 두고두고 비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애도성명을 내고 국민장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심기가 불편했는지, 국민장 2개월 뒤 인터뷰에서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기수는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라고 전했다며 해명했으나, 이 또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8.3. 김대중 [편집]
민주당 입주기념 리셉션에서 대화를 나누는 김대중 대표와 노무현 대변인 | 꽃다발을 들어 군중들에게 화답하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노무현 부총재 |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과 악수하는 김대중 대통령 |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당계 정당의 쌍벽 중 하나였지만, 그들의 하위 세력들은 서로 계파 갈등을 당 내부에서 일으키다 훗날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태를 거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만남은 김영삼이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김대중이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고 꼬마 민주당 창당에 합류한 노무현은 1년 후 신민당과의 합당을 통해 김대중과 동행하게 되지만, 애당초 출신 지역부터가 경남권인데다 정치 성향도 김대중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던 터라 민주당쪽에서도 비주류에 속했다. 게다가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 하나회를 축출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단죄하면서 호랑이 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던 3당 합당의 진짜 목적을 이뤄내자 김영삼과 결별했던 노무현의 입지가 경남권에서 더더욱 좁아진데다, 김대중이 1995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것을 두고도 구시대적인 패권 정치라는 비판을 한 뒤 민주당 잔류를 선택하면서 출신 지역 및 야권 주류 모두에서 외면받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1개월 전 민주당이 신한국당과의 합당으로 한나라당이 되자 이에 반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를 맡았고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하려다가 고건이 전략공천된데 대해 미련없이 승복하자[37] 김대중으로부터 "정치는 노무현처럼 해야 한다."는 극찬을 받을 만큼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되었으며 불과 한 달 뒤의 재보궐선거에서 종로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6년만의 국회 복귀에 성공하게 된다.
2년 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감정 타파를 부르짖으며 부산 북구·강서구 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4개월 후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되어 국무위원으로서 행정 경험을 쌓음과 동시에 격식을 타파하는 행보로 주목받았으며, 2년 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새천년민주당 국민 경선에서 일명 노풍을 타고 노무현이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애당초 노무현이 민주당의 대권 후보 자체로는 거론되었지만 실제 선출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고 여겨졌는데,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의 표를 잠식해 무려 19.2%(492만여표)를 얻어낸 국민신당 후보 이인제가 1998년 9월 합당 형식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 들어오면서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것이 매우 확실했고 김대중의 가신인 한화갑 의원과 유종근 전라북도지사까지 경선에 뛰어들면서 김대중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 그러나 김대중은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사실상 노풍을 암묵적으로 지지했고[38] 그 결과 노무현이 민주당 경선을 통과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 김대중의 아들 3명 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사법 처리 수순을 밟은데다 국가정보원을 이용한 도청 및 친인척 비리 등의 여러 스캔들로 호남권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 이회창의 지지율이 높아지던 와중에 노무현이 경남권 지지율 확장 및 진보 지지층 흡수 등으로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이끌어낼 유일한 카드로 돋보였던 것 역시 민주당 경선 승리의 원동력이기도 했는데, 이는 경남 기반 김영삼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김대중 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지역 감정 타파에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은게 밑거름이기도.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국민의 정부 불법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이 주도한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에 동교동계의 반발이 거셌고, 대선 때 9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호남권의 민심도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 해 4월 22일 청와대에서 노무현-김대중의 부부 동반 오찬 회동이 있었고 이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직접적으로 반목할 지경까지는 아니었고, 이후 특검 연장을 노무현이 거부하면서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친노 세력간에는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훗날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구 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권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교동계 인사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친노 성향 의원과 한나라당의 옛 민주당계 의원 5명 등을 주축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새천년민주당까지 가세하자 김대중은 "탄핵 사태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 정치가 변화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라는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의 편을 들었으며, 노무현이 탄핵 심판 기각으로 복귀하자 환영한다는 발언을 했다.
2009년 5월 23일 김대중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는데, 그날 새벽 노무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지만 정부의 사실상 거부로 대신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책의 추천사로 갈음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쇠약해졌는데도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분향소에 조문을 갔고, 영결식 당일에는 비서의 부축까지 받아가며 끝끝내 헌화까지 스스로 한 뒤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악수하며 오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었지만 사적으로는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이때부터 김대중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노무현이 사망한 지 3개월 만에 김대중도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만남은 김영삼이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김대중이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 1월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고 꼬마 민주당 창당에 합류한 노무현은 1년 후 신민당과의 합당을 통해 김대중과 동행하게 되지만, 애당초 출신 지역부터가 경남권인데다 정치 성향도 김대중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던 터라 민주당쪽에서도 비주류에 속했다. 게다가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 하나회를 축출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단죄하면서 호랑이 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던 3당 합당의 진짜 목적을 이뤄내자 김영삼과 결별했던 노무현의 입지가 경남권에서 더더욱 좁아진데다, 김대중이 1995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것을 두고도 구시대적인 패권 정치라는 비판을 한 뒤 민주당 잔류를 선택하면서 출신 지역 및 야권 주류 모두에서 외면받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1개월 전 민주당이 신한국당과의 합당으로 한나라당이 되자 이에 반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를 맡았고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하려다가 고건이 전략공천된데 대해 미련없이 승복하자[37] 김대중으로부터 "정치는 노무현처럼 해야 한다."는 극찬을 받을 만큼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되었으며 불과 한 달 뒤의 재보궐선거에서 종로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6년만의 국회 복귀에 성공하게 된다.
2년 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감정 타파를 부르짖으며 부산 북구·강서구 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4개월 후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되어 국무위원으로서 행정 경험을 쌓음과 동시에 격식을 타파하는 행보로 주목받았으며, 2년 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새천년민주당 국민 경선에서 일명 노풍을 타고 노무현이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애당초 노무현이 민주당의 대권 후보 자체로는 거론되었지만 실제 선출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고 여겨졌는데,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의 표를 잠식해 무려 19.2%(492만여표)를 얻어낸 국민신당 후보 이인제가 1998년 9월 합당 형식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 들어오면서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것이 매우 확실했고 김대중의 가신인 한화갑 의원과 유종근 전라북도지사까지 경선에 뛰어들면서 김대중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 그러나 김대중은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면서 사실상 노풍을 암묵적으로 지지했고[38] 그 결과 노무현이 민주당 경선을 통과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이 당시 김대중의 아들 3명 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사법 처리 수순을 밟은데다 국가정보원을 이용한 도청 및 친인척 비리 등의 여러 스캔들로 호남권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 이회창의 지지율이 높아지던 와중에 노무현이 경남권 지지율 확장 및 진보 지지층 흡수 등으로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이끌어낼 유일한 카드로 돋보였던 것 역시 민주당 경선 승리의 원동력이기도 했는데, 이는 경남 기반 김영삼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김대중 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지역 감정 타파에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은게 밑거름이기도.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국민의 정부 불법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이 주도한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수용한다. 이에 동교동계의 반발이 거셌고, 대선 때 90%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호남권의 민심도 부정적이었다. 다만 그 해 4월 22일 청와대에서 노무현-김대중의 부부 동반 오찬 회동이 있었고 이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직접적으로 반목할 지경까지는 아니었고, 이후 특검 연장을 노무현이 거부하면서 큰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친노 세력간에는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훗날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광주 서구 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권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교동계 인사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친노 성향 의원과 한나라당의 옛 민주당계 의원 5명 등을 주축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새천년민주당까지 가세하자 김대중은 "탄핵 사태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 정치가 변화할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라는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열린우리당과 노무현의 편을 들었으며, 노무현이 탄핵 심판 기각으로 복귀하자 환영한다는 발언을 했다.
2009년 5월 23일 김대중은 독일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는데, 그날 새벽 노무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지만 정부의 사실상 거부로 대신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책의 추천사로 갈음했다. 뿐만 아니라 몸이 쇠약해졌는데도 휠체어를 타면서까지 분향소에 조문을 갔고, 영결식 당일에는 비서의 부축까지 받아가며 끝끝내 헌화까지 스스로 한 뒤 권양숙 여사를 비롯한 유가족들과 악수하며 오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었지만 사적으로는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이때부터 김대중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노무현이 사망한 지 3개월 만에 김대중도 세상을 떠났다.
8.4. 이명박 [편집]
15대 총선 당시 후보자 등록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는 노무현 후보와 이명박 후보 | 전국 시ㆍ도지사 회의 당시 악수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서울특별시장 |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 |
노무현과 이명박의 만남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종로구에서 맞붙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선거에서는 이명박이 이겼지만, 이후 이명박이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재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39] 노무현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가 그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명박의 기사회생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8·15 광복절 대사면을 단행하면서 이명박의 피선거권이 회복된 이후, 이명박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전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됐다.[40] 청계천 복원 사업과 버스 노선 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 시기다. 같은 해 대선에서는 노란풍선 열풍을 일으킨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종로구에서 맞붙었던 경쟁자가 대통령과 서울특별시장으로 만난 셈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두 사람은 굵직굵직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노무현은 취임 직후 서울특별시장의 국무회의 참석 자격을 박탈하면서 이명박은 남은 임기 내내 국무회의에 1회를 제외하면 참석하지 못했다. 그 밖에 2005년 사학법 사건 때는 이명박이 종교계의 여론에 힘입어 강력 반대의사를 밝히고 직접 촛불집회까지 나갔었다.
다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청계천 복원 등 진보 대통령과 야당 시장으로 훈훈했던 시기도 있었다. 국무회의에 서울특별시장이 참석할 때도 생사를 가르며 첨예하게 대립한 한나라당 당내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애당초 청계천 복원은 초대형 사업이라 아무리 서울시라고 할지라도 시비로는 지을 수 없었다.[41]
대표적인 게 행정수도 이전인데, 이는 노무현의 핵심 공약이었다. 노무현 스스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과 관련,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라고 말했다. 이명박은 행정수도 이전 반대 최전선에 섰다. 이명박은 당시 참여정부를 "잠시 왔다가는 5년 임기의 정권"이라고 한 뒤 "수도 이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국민 투표를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위헌확인 심판 소송에서 '관습 헌법' 논리를 들면서 국민투표 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경제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참여정부 시절 '버블세븐'(서울 강남·서초·송파·목동, 경기 분당·용인·평촌)[42]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자, 이명박은 참여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 "서민경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강북 뉴타운을 내걸고 표심 잡기에 들어갔다. 보수 진영의 '세금 폭탄론'에 휘청거린 노무현은 진보 진영으로부터 부동산 원가공개 등의 요구를 받았지만, "자본주의 하에는 열 배 남는 장사도 있다."라고 일축, 탄핵 역풍으로 결집되었던 지지율도 날아가게 된다.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 퇴임 이후 곧바로 대권에 뛰어들었는데, 이 무렵 참여정부는 레임덕이 왔다. 노무현 개인의 지지도는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너무 형편없어서 한나라당에 대항할만한 체급의 대권주자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이명박은 박근혜를 누르고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후보가 된 그는 잃어버린 10년을 내세우며 정권교체 및 노무현 정권 심판을 선거 아젠다로 내걸었다. 이 상황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은 노무현을 당에서 사실상 쫓아내버리고 당내 갈등 같은 여러 내부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결국 이명박은 48.67%의 득표율로 정동영을 22% 차이로 누르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시기부터 이명박과 노무현은 앙숙 관계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명박이 노무현에게 인수위로 국정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에 노무현은 크게 분노해 기자회견을 통해 “아직 노무현 정부인데, 인수위로 국정 보고서 내라는 건 결국 반성문 쓰라는 거 아니냐?”는 강한 어조로 이명박을 비난했다. 두 사람이 청와대에서 회동을 할 때도 분위기가 매우 어색했을 정도다.
퇴임 후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내려간 뒤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불구대천의 악연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특히 2009년 박연차 게이트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검찰에 불려가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다. 노무현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은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이명박이 노무현과 가까운 '우리들병원', '토속촌', '제피로스'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의혹이 나오지 않자 '태광실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여권 내부에서 박연차 게이트를 놓고 표적 세무조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은 노무현의 비리를 조사할 때, 노무현과 술자리를 가졌던 사람들[43]과 악수 한 번 했던 편의점 점장 등 노무현과 한 번이라도 엮인 민간인을 상대로 검찰 조사를 하여 노무현에게 압박을 주었다. 그 결과 실제로 수많은 측근과 가족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무현은 결국 2009년 5월 23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피의자인 노무현의 자살로 기소가 불가능해진 검찰은 '공소권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범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혐의 처분과는 다르다.
이명박의 기사회생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8·15 광복절 대사면을 단행하면서 이명박의 피선거권이 회복된 이후, 이명박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전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됐다.[40] 청계천 복원 사업과 버스 노선 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 시기다. 같은 해 대선에서는 노란풍선 열풍을 일으킨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종로구에서 맞붙었던 경쟁자가 대통령과 서울특별시장으로 만난 셈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두 사람은 굵직굵직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노무현은 취임 직후 서울특별시장의 국무회의 참석 자격을 박탈하면서 이명박은 남은 임기 내내 국무회의에 1회를 제외하면 참석하지 못했다. 그 밖에 2005년 사학법 사건 때는 이명박이 종교계의 여론에 힘입어 강력 반대의사를 밝히고 직접 촛불집회까지 나갔었다.
다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청계천 복원 등 진보 대통령과 야당 시장으로 훈훈했던 시기도 있었다. 국무회의에 서울특별시장이 참석할 때도 생사를 가르며 첨예하게 대립한 한나라당 당내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애당초 청계천 복원은 초대형 사업이라 아무리 서울시라고 할지라도 시비로는 지을 수 없었다.[41]
대표적인 게 행정수도 이전인데, 이는 노무현의 핵심 공약이었다. 노무현 스스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과 관련,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라고 말했다. 이명박은 행정수도 이전 반대 최전선에 섰다. 이명박은 당시 참여정부를 "잠시 왔다가는 5년 임기의 정권"이라고 한 뒤 "수도 이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국민 투표를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위헌확인 심판 소송에서 '관습 헌법' 논리를 들면서 국민투표 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경제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참여정부 시절 '버블세븐'(서울 강남·서초·송파·목동, 경기 분당·용인·평촌)[42]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자, 이명박은 참여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 "서민경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강북 뉴타운을 내걸고 표심 잡기에 들어갔다. 보수 진영의 '세금 폭탄론'에 휘청거린 노무현은 진보 진영으로부터 부동산 원가공개 등의 요구를 받았지만, "자본주의 하에는 열 배 남는 장사도 있다."라고 일축, 탄핵 역풍으로 결집되었던 지지율도 날아가게 된다.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 퇴임 이후 곧바로 대권에 뛰어들었는데, 이 무렵 참여정부는 레임덕이 왔다. 노무현 개인의 지지도는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너무 형편없어서 한나라당에 대항할만한 체급의 대권주자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이명박은 박근혜를 누르고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후보가 된 그는 잃어버린 10년을 내세우며 정권교체 및 노무현 정권 심판을 선거 아젠다로 내걸었다. 이 상황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은 노무현을 당에서 사실상 쫓아내버리고 당내 갈등 같은 여러 내부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결국 이명박은 48.67%의 득표율로 정동영을 22% 차이로 누르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시기부터 이명박과 노무현은 앙숙 관계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명박이 노무현에게 인수위로 국정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는데, 이에 노무현은 크게 분노해 기자회견을 통해 “아직 노무현 정부인데, 인수위로 국정 보고서 내라는 건 결국 반성문 쓰라는 거 아니냐?”는 강한 어조로 이명박을 비난했다. 두 사람이 청와대에서 회동을 할 때도 분위기가 매우 어색했을 정도다.
퇴임 후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내려간 뒤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불구대천의 악연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특히 2009년 박연차 게이트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검찰에 불려가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다. 노무현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은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이명박이 노무현과 가까운 '우리들병원', '토속촌', '제피로스'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의혹이 나오지 않자 '태광실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여권 내부에서 박연차 게이트를 놓고 표적 세무조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은 노무현의 비리를 조사할 때, 노무현과 술자리를 가졌던 사람들[43]과 악수 한 번 했던 편의점 점장 등 노무현과 한 번이라도 엮인 민간인을 상대로 검찰 조사를 하여 노무현에게 압박을 주었다. 그 결과 실제로 수많은 측근과 가족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무현은 결국 2009년 5월 23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피의자인 노무현의 자살로 기소가 불가능해진 검찰은 '공소권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범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혐의 처분과는 다르다.
8.5. 박근혜 [편집]
여야 5당 대표 초청 만찬에서 악수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
참여정부 내내 모든 정책에서 사사건건 부딪친 적이 많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박근혜는 대표적으로 사학법 개정과 대북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했고, 장외투쟁까지 강행하면서 사학법 개정을 무산시켰다.
참여정부 마지막 의전비서관을 지낸 오상호 전 비서관[44]의 '노무현의 알릴레오' 책 내용을 보면 참여정부 출범 이후, 원래 노무현은 참여정부의 통일부 장관 후보로 박근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당시 박근혜는 방북해서 김정일도 만나고 오는 등으로 남북관계에 대해서 정통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체질에 맞을 거 같아서 제안했더니 박근혜는 "방향이 맞아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박근혜는 이후로도 노무현과 대북 정책 건으로 사사건건 부딪치는 등, 참여정부의 숙적이였다.
또 한나라당 의원들이 오로지 노무현 하나를 비난하기 위해서 만든 연극 환생경제를 관람하고 극찬하는 등 노무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06년 7월 14일 정책기획위원회 오찬에서는 "역사에서 박근혜를 당선시키는 것은 군사독재의 향수, 군사독재에 대한 사면 이런 의미를 줘버리는 것이거든요. 한국의 역사가 그리 가서야 되겠는가"며, 박근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 대권주자로 야권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부상하고 있을 때였다. 이 당시 야권의 특정인을 비판한다며 여론의 비난을 당하기도 했다.
약 6년 뒤에 치러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가 당선되긴 했지만, 임기를 다 채우지 못 하고 탄핵되면서 해당 발언에 대해 비로소 재평가가 이뤄졌다.
참여정부 마지막 의전비서관을 지낸 오상호 전 비서관[44]의 '노무현의 알릴레오' 책 내용을 보면 참여정부 출범 이후, 원래 노무현은 참여정부의 통일부 장관 후보로 박근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당시 박근혜는 방북해서 김정일도 만나고 오는 등으로 남북관계에 대해서 정통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체질에 맞을 거 같아서 제안했더니 박근혜는 "방향이 맞아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박근혜는 이후로도 노무현과 대북 정책 건으로 사사건건 부딪치는 등, 참여정부의 숙적이였다.
또 한나라당 의원들이 오로지 노무현 하나를 비난하기 위해서 만든 연극 환생경제를 관람하고 극찬하는 등 노무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06년 7월 14일 정책기획위원회 오찬에서는 "역사에서 박근혜를 당선시키는 것은 군사독재의 향수, 군사독재에 대한 사면 이런 의미를 줘버리는 것이거든요. 한국의 역사가 그리 가서야 되겠는가"며, 박근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 대권주자로 야권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부상하고 있을 때였다. 이 당시 야권의 특정인을 비판한다며 여론의 비난을 당하기도 했다.
약 6년 뒤에 치러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가 당선되긴 했지만, 임기를 다 채우지 못 하고 탄핵되면서 해당 발언에 대해 비로소 재평가가 이뤄졌다.
9. 어록 [편집]
<bgcolor=#fff,#1c1fd1f>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노무현, 자신에 대한 악성 댓글에 대해 남긴 말 |
<bgcolor=#fff,#1c1fd1f>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어떠한 번영도 있을 수 없다. 노무현, 검찰개혁 연설 중 |
<bgcolor=#fff,#1c1fd1f>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생활고로 일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늘어만 갑니다. (중략) 월남전 생각이 납니다. 월남전에 대해서 온 세계가 비난을 하고 있었을 때 정부는 슬그머니 여론을 이렇게 조성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여해서 벌어온 돈으로 우리 경제가 발전되었노라고. 이렇게 사람을 속이려 했습니다. 이런 발상이야 말로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백성 몇만 명 죽일 수 있다는 끔찍한 발상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이를 크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킵시다! 노무현, 제142회 임시국회 대정부질의 중 |
<bgcolor=#fff,#1c1fd1f> 그럼 국민의 비난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본 의원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의혹이 엄청나게 남아있습니다! 노무현, 5공 청문회 도중 답변에 불성실한 증인들에 대해 분노하며 |
<bgcolor=#fff,#1c1fd1f> 결코 굽히지 않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살아있는 영혼이!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이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증거를 여러분들에게 보여줌으로 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노무현, 제1회 부산광역시장 선거 유세 중 |
<bgcolor=#fff,#1c1fd1f>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구에서도 콩인,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해서 인물과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그래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이 노무현이 열겠습니다. 노무현, 16대 총선 유세 중 |
<bgcolor=#fff,#1c1fd1f>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됐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 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 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노무현, 제16대 대통령 선거 새천년민주당 후보 국민 경선 출마 연설문 중 |
<bgcolor=#fff,#1c1fd1f> 음모론, 색깔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 이제 중단해주십시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추어서 저를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제 장인은 좌익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에 실명을 하셔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생각해본 일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어느 언론사를 대통령이 폐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국유화, 폐간, 어떤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선 안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제게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의 견해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서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45]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인천 지역 국민경선 연설문 중 |
<bgcolor=#fff,#1c1fd1f>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 시장에, 자갈치 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 중 |
<bgcolor=#fff,#1c1fd1f>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 성별, 학력, 지역에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세상. 어느 꿈은 이미 현실이 되었고 어느 꿈은 아직 땀을 더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아직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하셨다면, 우리 아이들이 커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그려보세요. 행복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회창, 권영길 후보님. 수고하셨습니다. 국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기호 2번 노무현입니다.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당시 광고 '노무현의 편지' 중 |
<bgcolor=#fff,#1c1fd1f>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하면 되지, 내가 꼭 거기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노무현, 대통령 후보 시절 유시민과의 대화 중 |
<bgcolor=#fff,#1c1fd1f> 대통령이 다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하다가는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그 위기감이 생깁니다. 노무현, 2003 5.18 행사추진위 간부 접견 중 |
<bgcolor=#fff,#1c1fd1f> 새시대의 맏형이 되겠다는 꿈에서 한발 물러서겠다. 옛날 시대의 막내가 되겠다. 새로운 세대가 나올 수 있도록 과도기 관리를 확실히 하겠다. 노무현, 한국청년회의소(JC) 임원단 간담회 중 |
<bgcolor=#fff,#1c1fd1f>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 노무현, TV 생중계 기자회견 중[46] |
<bgcolor=#fff,#1c1fd1f>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북한의 주장은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노무현, LA 연설 중 |
<bgcolor=#fff,#1c1fd1f> 나는 초선의원 시절부터 팔메 수상을 이야기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그려왔습니다. 노무현, 청와대 출입 기자에게 전송한 메일 중 |
<bgcolor=#fff,#1c1fd1f>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 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노무현, 2006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도사 중 |
<bgcolor=#fff,#1c1fd1f>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중략)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경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 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독도 문제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의식, 자주 독립의 역사와 주권 수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노무현, 한일관계에 관한 특별담화문 |
<bgcolor=#fff,#1c1fd1f> 사람은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도 있고, 지배 받는 사람도 있는데, 내 희망은 이 차이가 작기 바란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 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와 국민이 소통해야 한다. 노무현, 경복궁 신무문 개방행사 중 |
<bgcolor=#fff,#1c1fd1f>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를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주 국가,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은 유지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때때로 한 번씩 배짱이라도 내볼 수 있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2사단 빠지면 다 죽게 생긴 나라에서, 다 죽는다고 국민들이 와들와들 떠는 나라에서 무슨 대통령이, 무슨 외교부장관이 미국의 공무원과 대등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심리적 의존관계를 해소해야 됩니다. 노무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50차 상임위원회 연설 중 |
<bgcolor=#fff,#1c1fd1f>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노무현, 노사모 총회 축하 연설 중 |
<bgcolor=#fff,#1c1fd1f>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노무현, 방명록 중 |
<bgcolor=#fff,#1c1fd1f> 내가 7번 선거를 해서 4번을 졌거든요. 근데 대통령도 했어요.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인생은 항상 겨루기지만 반드시 항상 이기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니고, 진 사람도 다시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회, 그 사회가 좋은 사회이고, 한번 겨루기해서 진 사람도 다음 겨루기에서 또 이길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 아니겠어요? 노무현, 진영대창고등학교 운동회 |
<bgcolor=#fff,#1c1fd1f> 지금 정상문 전 비서관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정 비서관이 자신이 한 일로 진술하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그 혐의는 정 비서관의 것이 아니고 저희들의 것입니다. 저의 집[47]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 미처 갚지 못한 빚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수뢰혐의에 대한 사과문 중 |
<bgcolor=#fff,#1c1fd1f>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노무현, 유서 중 |
9.1. 제16대 대통령 취임사 [편집]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취임사 |
취임사 전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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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저서 [편집]
11. 직(直) 가계 [편집]
- 32대조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
- 31대조 시조(始祖) 노해(盧垓)
- 29대조 노천유 (盧遷壝)
- 28대조 노아조 (盧阿祚)
- 27대조 노인미 (盧仁美)
- 26대조 노도충 (盧到忠)
- 25대조 노공비 (盧公庇)
- 24대조 노윤 (盧倫)
- 23대조 노승조 (盧承肇) - 규정공파(糾正公派)의 파조
- 22대조 노창 (盧鶬)
- 21대조 노인정 (盧仁正)
- 20대조 노효손 (盧孝孫)
- 19대조 노계종 (盧繼宗)
- 18대조 노갑생 (盧甲生)
- 17대조 노선경 (盧善卿)
- 15대조 노수창 (盧壽昌)
- 현조부(5대조) 노유준 (盧有峻, 1784년 ~ ?)
12. 가족 관계 [편집]
13. 선거 이력 [편집]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8 | 53,075 (51.00%) | 당선 (1위) | 초선 | |||
1992 | 30,397 (32.25%) | 낙선 (2위) | ||||
1995 | 647,297 (37.58%) | |||||
1996 | 17,330 (17.66%) | 낙선 (3위) | ||||
1998 | 26,251 (54.44%) | 당선 (1위) | 재선[53] | |||
2000 | 27,136 (35.69%) | 낙선 (2위) | ||||
2002 | 12,014,277 (48.91%) | 당선 (1위)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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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후보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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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상훈 [편집]
- 2004년 영국 최고 훈장 베스 대십자훈장
- 2004년 폴란드 흰 독수리 훈장
- 2005년 미국 벤 플린트 수상
- 2007년 카타르 독립대훈장
- 2007년 덴마크 코끼리의 기사 수상
- 2008년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 2008년 Mnet 20's Choice 2008년 올해의 컴백스타 1위
15. 소속 정당 [편집]
16. 창작물 [편집]
-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몇몇 장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오마주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 # 실제로 이 때문에 전술한 영화 변호인과 함께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관련 내용이 거론되기도 했다.
- 2016년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 2017년 노무현입니다의 주역이 되었다.
- 2017년 오디오 드라마 그 사람 노무현에선 성우 홍진욱이 노무현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 2023년 교섭에 잠깐이나마 출연하여 주인공에게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허가한다.
17. 역대 프로필 사진 [편집]
판사 시절 | 변호사 시절 | 제13대 국회의원 초선의원 시절 (1988년) |
제16대 대통령 후보 시절 (2002년) | 제16대 대통령 시절 (2003년 2월 25일) |
18. 관련 문서 [편집]
18.1. 사건 [편집]
18.2. 발언 [편집]
18.3. 기타 [편집]
19. 여담 [편집]
20. 둘러보기 [편집]
노무현 관련 틀 |
[1] 음력 1946년 8월 6일. 생전에는 음력 생일로 지냈으나, 사후에는 양력 생일을 전후하여 고향 봉하마을에서 매년 봉하음악회가 열리고 있다.[2] 병원 이송 중 경호차량에서 사망했다.[3] 생전 거주지, 퇴임 후 이곳에서 지냈으며 생가 건너편이다.[4] 취임 전 거주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로9길 24, 302호 (명륜1가, 현대하이츠빌라). 종로구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이사 온 집이다. 1997년부터 대통령 취임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당선 후 청와대로 가면서 "꼭 6년 전 이사 와 15대 보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짧은 해양수산부장관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라는 소회를 밝혔다. 해당 집은 전직 중소기업인에게 팔렸다고 한다.[5] 생가 동쪽에 위치해 있다. # 고인의 유언에 따라 국립묘지가 아닌 이곳에 안장되었다.[6] 2004헌나1에 의한 직무정지 기간: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7] 광주군계 매죽와공파 31세손 ○현(○鉉) 항렬.
(족보(1)족보(2))[8] 출처[9] 2008년 5월 2일 운동회 현장 연설 중에 밝혔으며, 아내 또한 37회 졸업생이다.[10] 중학교 시절 1년 휴학하는 바람에 고등학교도 1년 늦게 입학하여 19세가 아닌 20세가 되는 해에 졸업하였다.[11] 상병 만기 전역인 이유는 노무현이 병역을 수행하던 시절에는 베트남 전쟁 파병자와 분대장, 특수임무자에게만 병장을 달아주어 보통의 장병들은 진급 상한선이 상병까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30개월 이상 복무한 상등병 만기전역자의 특별진급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권양숙 여사 등 유족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계급이 병장이 되게 하길 원한다면 군적이 병장 전역으로 변경될 수 있다.[12] 병무청공고제2003-6호(병역사항공개대상자병역사항공개, 2003.2.27.)[13] 공식적으로는 무종교였지만 종교 이력은 꽤 특이하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봉하마을 집 근처의 절 정토원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이 때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을 불교적 용어인 도반(道伴)으로 칭하기도 했고 이후 변호사 시절에 정신적 지주라고 불리는 송기인 신부와의 인연으로 당시 송기인 신부가 주임 신부로 시무하였던 부산 당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때문인지 신앙 생활은 커녕 성당에 몇 번 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고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해인사를 방문하는 등 불교적인 활동을 몇 번 한 적은 있었다. 참고로 사망하기 직전에도 사시를 공부했던 봉화산 정토원에서 위패에 예를 표하기도 했으며 장례식 때 해인사의 스님들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 # [14] 2003년 7월 19일 MBC 예능 느낌표에 출연했을 때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키가 작아 반에서 번호가 1번 또는 2~3번이었으나 졸업 이후 많이 자랐다고 이야기했다. # 참고로 1940년대생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66~167cm 정도로, 노무현도 자기 세대 평균에 가까웠다.[15] 국민학교는 1959년 졸업했지만 중학교 입시를 1년 재수하여 1960년에 진영중학교에 입학했다.[16] 학교에서 주선해 준 회사로, 어망 제조회사였다. 농협 입사 시험에 낙방한 후 친구들과 함께 입사했지만 적은 월급 때문에 한 달 반만에 퇴사한 후 막노동을 하며 돈을 모아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17] 원래 1군사령부 부관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다가 전방 차출을 자원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병장 계급에 TO 제한이 있어 파월장병, 특수임무수행자, 분대장에게만 병장 계급을 달아줬기 때문에 보통의 장병들은 상병 만기 전역이 대부분이었다.[18] 해마루 홈페이지. 국회의원 임기가 만료된 상태에서 천정배에 의해 고용되어 1998년까지 근무했다.[19] 전임자 이명박의 사퇴로 시행된 재보궐선거에서 당선.[20] 비학위과정.[21] 비학위과정.[22] 초상화는 이종구 화백이 그렸다고 한다. 2008년 인터뷰 기사 [23] 나머지 1명인 안대희 전 대법관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중퇴 학력으로서 고졸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고졸 학력은 노무현이 유일했다고 볼 수 있다.[24] 이러한 여론은 결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단독 과반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25] 처음에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 소재한 인근 병원, 두 번째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다.[26]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27] 실제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전경련 등 일부 보수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영어 위키백과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 문서에서도 노무현을 밀, 나우만, FDR, 트뤼도, 모사데크, 올린, 포퍼, 누스바움 같은 대표적인 사회자유주의 정치인이나 권위 있는 학자들과 함께 나란히 저명한 사상가(Notable thinkers)로 분류되어 있는 걸 보면 국제적으로도 사회자유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having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evolution of social liberalism)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듯하다.[28] 글을 새기는 돌을 모집한다는 응모글을 올리자마자 마감될 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1 #2[29] 박정희 같은 독재자와 같은 곳에 묻히기 싫다고 사후 서울현충원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박정희는 1979년 사망, 윤보선은 1990년 사망. 박정희가 윤보선보다 스무 살 어리지만 윤보선보다 11년 빨리 죽었다.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61세에 사망하기도 했고 윤보선이 90세가 넘도록 장수했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30] 묘지 관리는 국가 외에도 봉하마을과 노무현재단도 공동으로 하는 듯 하다.[31] 특히 2022년 13주기 추도식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운동 기간과 겹쳐서 민주당 전통 지지층 표심 결집을 위해 민주당 주요 인물들이 봉하마을에 결집했다.[32] 이때 노무현과 같이 인권변호사 일을 하던 문재인에게도 김영삼이 정계 입문을 제안했지만, 당시 문재인은 거절했다고 한다.[33] 당시 연접 지역구였던 부산 서구 지역에 당선됐던 사람이 바로 김영삼이었으며 김영삼과의 합동유세로 3허였던 민주정의당의 허삼수를 꺾고 당선되었다.[34] 훗날, 노무현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부산 지역의 선대 위원장을 맡으며, 부산에 초록 깃발을 꽂는 데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35] 김영삼 사후에야 문민 정부만의 탓으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주류가 되며 재평가가 상당수 이루어졌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김영삼 하면 외환 위기를 불러온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퇴임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36] 3당 합당 당시에는 군사정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지만, 이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37] 이 때 노무현과 경쟁한 당내 인사가 바로 한광옥이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김대중의 최측근이었음에도 서울시장 전략공천에 강하게 반발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38] 특히 민주당 텃밭인 광주광역시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하는 대이변이 벌어졌는데, 이는 노무현이 이회창을 상대로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민주당 후보라는 여론조사 결과의 영향도 컸지만 김대중의 침묵 또한 영향이 꽤 컸다.[39]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종로구에서는 선임-후임 의원이었던 두 사람이 10여년 이후에는 뒤바뀌어서 대통령 선임-후임이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40] 당시 노무현은 이명박과 서울시장 후보로 맞붙은 김민석의 지원유세를 다녔다.[41] 노무현에게나 이명박에게나 정말 안 좋은 관계는 따로 있었다.[42] 재밌는 건 국민의 정부 때도 집값을 낮추려는 정책을 하기 위해 주택 공급 정책을 냈으나 큰 재미를 못 봤다는 것이다.[43] 고향 사람들까지 포함[44] 22대 총선에서 오산시에 출마선언을 했으나 컷오프되었다.[45] 절묘하게도 이 발언 직후 연설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46] 이 발언 직후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은 한강에서 투신자살했고,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47] 노무현의 배우자인 권양숙 여사를 의미한다.[유작] [49] 족보상에는 명나라 연호인 成化(성화)로 표기되어 있다.[50] 족보상에는 명나라 연호인 嘉靖(가정)으로 표기되어 있다.[51] 족보상에는 명나라 연호인 嘉靖(가정)으로 표기되어 있다.[52] 족보상에는 명나라 연호인 萬曆(만력)으로 표기되어 있다.[53] 전임자 이명박 사퇴 (불법 선거 운동)[54] 2003.9.29. 탈당.
2004.5.20. 입당.
2007.2.28. 탈당.[55] 재보궐선거 때 쓴 사진을 좌우반전 시켜서 다시 사용하였다.[56] 당시 소속 정당인 민주당이 원내 제3당이었기에 기호 3번을 부여받았다.[57] 원내 제1당 소속으로 선거를 치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훗날 대통령에 당선된 후 치러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본인의 소속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제2공화국 내각제 시절 이후로는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으로서 원내 제1당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58]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탈당.[59]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60]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61]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한국당-민주당 합당 반대)[62]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63]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한 탈당.[64]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2월 28일자로 탈당.[65] 물론 사진은 합성이다. 이 사진은 순재네 병원에 걸려 마지막화까지 뒷배경으로 쭉 등장한다. #[66] 게다가, 송강호는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년 간 산 적이 있었다. 진영읍은 다들 알다시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다.[67] 오랜 민주당 지지자이다.[68] 최석필은 김종성이 해설할 때, 이상훈은 원호섭이 해설을 맡은 뒤 연기했다.[69] 실제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강금실이다.[70] 그냥 뜬금없이 '이기야!'라고 외친 건 아니고 국군을 비판하며 나온 발언이다. 사실, '이기야'가 아니라 입모양을 보면 '이기 짐(이게 지금)'이 유력하다.[71] 노무현이 정계 진출하기 전의 임지이다.[72] 대부분 친문 중진 인사들이 과거 친노에 속했다.[A] 73.1 73.2 중구·동구·영도구 선거구의 제12대 국회의원이다.[75] 의원직 사퇴.[76]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족보(1)족보(2))[8] 출처[9] 2008년 5월 2일 운동회 현장 연설 중에 밝혔으며, 아내 또한 37회 졸업생이다.[10] 중학교 시절 1년 휴학하는 바람에 고등학교도 1년 늦게 입학하여 19세가 아닌 20세가 되는 해에 졸업하였다.[11] 상병 만기 전역인 이유는 노무현이 병역을 수행하던 시절에는 베트남 전쟁 파병자와 분대장, 특수임무자에게만 병장을 달아주어 보통의 장병들은 진급 상한선이 상병까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30개월 이상 복무한 상등병 만기전역자의 특별진급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권양숙 여사 등 유족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계급이 병장이 되게 하길 원한다면 군적이 병장 전역으로 변경될 수 있다.[12] 병무청공고제2003-6호(병역사항공개대상자병역사항공개, 2003.2.27.)[13] 공식적으로는 무종교였지만 종교 이력은 꽤 특이하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봉하마을 집 근처의 절 정토원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이 때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을 불교적 용어인 도반(道伴)으로 칭하기도 했고 이후 변호사 시절에 정신적 지주라고 불리는 송기인 신부와의 인연으로 당시 송기인 신부가 주임 신부로 시무하였던 부산 당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때문인지 신앙 생활은 커녕 성당에 몇 번 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고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해인사를 방문하는 등 불교적인 활동을 몇 번 한 적은 있었다. 참고로 사망하기 직전에도 사시를 공부했던 봉화산 정토원에서 위패에 예를 표하기도 했으며 장례식 때 해인사의 스님들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 # [14] 2003년 7월 19일 MBC 예능 느낌표에 출연했을 때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키가 작아 반에서 번호가 1번 또는 2~3번이었으나 졸업 이후 많이 자랐다고 이야기했다. # 참고로 1940년대생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66~167cm 정도로, 노무현도 자기 세대 평균에 가까웠다.[15] 국민학교는 1959년 졸업했지만 중학교 입시를 1년 재수하여 1960년에 진영중학교에 입학했다.[16] 학교에서 주선해 준 회사로, 어망 제조회사였다. 농협 입사 시험에 낙방한 후 친구들과 함께 입사했지만 적은 월급 때문에 한 달 반만에 퇴사한 후 막노동을 하며 돈을 모아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17] 원래 1군사령부 부관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다가 전방 차출을 자원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병장 계급에 TO 제한이 있어 파월장병, 특수임무수행자, 분대장에게만 병장 계급을 달아줬기 때문에 보통의 장병들은 상병 만기 전역이 대부분이었다.[18] 해마루 홈페이지. 국회의원 임기가 만료된 상태에서 천정배에 의해 고용되어 1998년까지 근무했다.[19] 전임자 이명박의 사퇴로 시행된 재보궐선거에서 당선.[20] 비학위과정.[21] 비학위과정.[22] 초상화는 이종구 화백이 그렸다고 한다. 2008년 인터뷰 기사 [23] 나머지 1명인 안대희 전 대법관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중퇴 학력으로서 고졸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고졸 학력은 노무현이 유일했다고 볼 수 있다.[24] 이러한 여론은 결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단독 과반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25] 처음에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 소재한 인근 병원, 두 번째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다.[26]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27] 실제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전경련 등 일부 보수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영어 위키백과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 문서에서도 노무현을 밀, 나우만, FDR, 트뤼도, 모사데크, 올린, 포퍼, 누스바움 같은 대표적인 사회자유주의 정치인이나 권위 있는 학자들과 함께 나란히 저명한 사상가(Notable thinkers)로 분류되어 있는 걸 보면 국제적으로도 사회자유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having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evolution of social liberalism)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듯하다.[28] 글을 새기는 돌을 모집한다는 응모글을 올리자마자 마감될 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1 #2[29] 박정희 같은 독재자와 같은 곳에 묻히기 싫다고 사후 서울현충원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박정희는 1979년 사망, 윤보선은 1990년 사망. 박정희가 윤보선보다 스무 살 어리지만 윤보선보다 11년 빨리 죽었다.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61세에 사망하기도 했고 윤보선이 90세가 넘도록 장수했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30] 묘지 관리는 국가 외에도 봉하마을과 노무현재단도 공동으로 하는 듯 하다.[31] 특히 2022년 13주기 추도식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운동 기간과 겹쳐서 민주당 전통 지지층 표심 결집을 위해 민주당 주요 인물들이 봉하마을에 결집했다.[32] 이때 노무현과 같이 인권변호사 일을 하던 문재인에게도 김영삼이 정계 입문을 제안했지만, 당시 문재인은 거절했다고 한다.[33] 당시 연접 지역구였던 부산 서구 지역에 당선됐던 사람이 바로 김영삼이었으며 김영삼과의 합동유세로 3허였던 민주정의당의 허삼수를 꺾고 당선되었다.[34] 훗날, 노무현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부산 지역의 선대 위원장을 맡으며, 부산에 초록 깃발을 꽂는 데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35] 김영삼 사후에야 문민 정부만의 탓으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주류가 되며 재평가가 상당수 이루어졌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김영삼 하면 외환 위기를 불러온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퇴임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36] 3당 합당 당시에는 군사정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지만, 이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37] 이 때 노무현과 경쟁한 당내 인사가 바로 한광옥이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김대중의 최측근이었음에도 서울시장 전략공천에 강하게 반발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38] 특히 민주당 텃밭인 광주광역시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하는 대이변이 벌어졌는데, 이는 노무현이 이회창을 상대로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민주당 후보라는 여론조사 결과의 영향도 컸지만 김대중의 침묵 또한 영향이 꽤 컸다.[39]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종로구에서는 선임-후임 의원이었던 두 사람이 10여년 이후에는 뒤바뀌어서 대통령 선임-후임이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40] 당시 노무현은 이명박과 서울시장 후보로 맞붙은 김민석의 지원유세를 다녔다.[41] 노무현에게나 이명박에게나 정말 안 좋은 관계는 따로 있었다.[42] 재밌는 건 국민의 정부 때도 집값을 낮추려는 정책을 하기 위해 주택 공급 정책을 냈으나 큰 재미를 못 봤다는 것이다.[43] 고향 사람들까지 포함[44] 22대 총선에서 오산시에 출마선언을 했으나 컷오프되었다.[45] 절묘하게도 이 발언 직후 연설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46] 이 발언 직후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은 한강에서 투신자살했고,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47] 노무현의 배우자인 권양숙 여사를 의미한다.[유작] [49] 족보상에는 명나라 연호인 成化(성화)로 표기되어 있다.[50] 족보상에는 명나라 연호인 嘉靖(가정)으로 표기되어 있다.[51] 족보상에는 명나라 연호인 嘉靖(가정)으로 표기되어 있다.[52] 족보상에는 명나라 연호인 萬曆(만력)으로 표기되어 있다.[53] 전임자 이명박 사퇴 (불법 선거 운동)[54] 2003.9.29. 탈당.
2004.5.20. 입당.
2007.2.28. 탈당.[55] 재보궐선거 때 쓴 사진을 좌우반전 시켜서 다시 사용하였다.[56] 당시 소속 정당인 민주당이 원내 제3당이었기에 기호 3번을 부여받았다.[57] 원내 제1당 소속으로 선거를 치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훗날 대통령에 당선된 후 치러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본인의 소속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제2공화국 내각제 시절 이후로는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으로서 원내 제1당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58]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탈당.[59]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60]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61]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한국당-민주당 합당 반대)[62]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63]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한 탈당.[64]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2월 28일자로 탈당.[65] 물론 사진은 합성이다. 이 사진은 순재네 병원에 걸려 마지막화까지 뒷배경으로 쭉 등장한다. #[66] 게다가, 송강호는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년 간 산 적이 있었다. 진영읍은 다들 알다시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다.[67] 오랜 민주당 지지자이다.[68] 최석필은 김종성이 해설할 때, 이상훈은 원호섭이 해설을 맡은 뒤 연기했다.[69] 실제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강금실이다.[70] 그냥 뜬금없이 '이기야!'라고 외친 건 아니고 국군을 비판하며 나온 발언이다. 사실, '이기야'가 아니라 입모양을 보면 '이기 짐(이게 지금)'이 유력하다.[71] 노무현이 정계 진출하기 전의 임지이다.[72] 대부분 친문 중진 인사들이 과거 친노에 속했다.[A] 73.1 73.2 중구·동구·영도구 선거구의 제12대 국회의원이다.[75] 의원직 사퇴.[76]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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