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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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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일생]]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노무현/일생)] ||<tablewidth=400><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5ba6,#005ba6><nopad> [[파일:노무현대통령초상화.png|width=100%]] || ||<nopad> {{{#!wiki style="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67f 0%, #005ba6 20%, #005ba6 80%, #00467f)" {{{#ffc224,#ffc224 '''공식 초상화'''[* 초상화는 이종구 화백이 그렸다고 한다. [[https://www.kyeongin.com/article/360256|2008년 인터뷰 기사]] ] }}}}}} || [[고졸]] 학력으로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 사법시험 전체 합격자 60명 중에 단 둘뿐인 고졸 합격자였다.[* 나머지 1명인 [[안대희]] 전 [[대법관]]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중퇴 학력으로서 고졸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고졸 학력은 노무현이 유일했다고 볼 수 있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7개월 만에 사퇴하고 1978년 [[부산광역시]]에서 [[변호사]] 사무소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하였다. 한편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일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권 변호사 활동 경력을 눈여겨본 [[김영삼]]의 제의를 받아 1988년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같은 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구(부산 선거구)|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전직 대통령]], [[정주영|재벌 회장]]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질의하는 모습이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합당에 찬성한 [[김영삼]]과 결별하였고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당계 정당]]에 눌러앉게 되었다. 이후 영호남 [[지역감정|지역주의]]가 심화되며 부산에서 본의 아닌 고전을 거듭하던 중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종로구(선거구)|종로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선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종로 대신 부산에 출마하여 또 한 번 낙선했다. 이런 모습을 본 지지자들은 그에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때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가 탄생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거쳐,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당초 승리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평가된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1위를 하는 대이변을 일으켰고, 본선에서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2.33%p의 근소한 차이로 꺾고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 새천년민주당의 분열이 일어났을 때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열린우리당을 지지해달라는 발언 하나 때문에 새천년민주당이 주도하고 한나라당이 동참하여 헌정 사상 최초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탄핵소추를 당하고]] 말았다. 여론으로도 억지 탄핵소추라는 의견이 압도했으며[* 이러한 여론은 결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단독 과반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탄핵심판 또한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되어서 직무에 복귀했다.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퇴임 후 [[서울특별시]]가 아닌 고향 [[경상남도]] [[봉하마을]]로 귀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친노 진영의 많은 인물들이 [[박연차 게이트]] 관련하여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받았으며 노무현과 그의 배우자인 [[권양숙]] 또한 수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던 중 [[2009년]] [[5월 23일]] 오전 5시 21분에 [[노무현/유서|유서]]를 컴퓨터에 저장하고 [[봉화산(김해)|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투신]]하였다. 직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나[* 처음에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 소재한 인근 병원, 두 번째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두부외상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인해 결국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민장 기간 동안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에 [[https://www.yna.co.kr/view/AKR20090526061900051|1천만 명]]에 달하는 조문 인파가 몰렸다. 원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었지만, 본인이 [[노무현/유서|유서]]에서 [[화장(장례)|화장]]하고 집 가까운 곳에 안치하라는 요청[*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에 따라 수원연화장에서 화장되어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근처 묘역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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